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10 민주 항쟁 (문단 편집) === [[신군부]]의 [[무조건 항복]] === || [[파일:external/www.sisanewsline.co.kr/1005_483_4319.jpg|width=100%]] || ||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 행렬.[*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의 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 삼거리이다.] ||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먼저 민정당은 6월 21일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인 22일에 전두환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김영삼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틀에 걸쳐 협상을 조율한 끝에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의가 성사되었지만, 김영삼이 요구한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전두환이 거부해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국국민당 총재 [[이만섭]]과의 회담도 이루어졌는데, 이때 이만섭은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이다.], [[상도동(서울)|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으로 1969년부터 거주하였다.]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이 발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노태우]]와도 이틀 전에 만나 직선제로 하자고 설득을 했다. 25일에는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드디어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선언으로 노태우는 일약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6월 항쟁의 대미는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처음에는 연세대 교정에서 군중 10만명으로 시작해 신촌 네거리 노제에서 30만, 시청 앞에선 '''100만여 명'''으로 각각 늘어났다. 이 장례식 참가 인원수는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집회 중 최고였다. 이 기록은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와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190만)/[[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232만)로 인해 깨졌다. 그러나 이한열의 장례식 당시 100만여 명은 정부 추산(= 순간 최대 인원. 연세대에서 명동까지 꽉 채웠던 인파가 광화문 광장부터 서울역까지 꽉 채운 인원보다 적었을 리가). 정부 추산 43만인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의 날 당시 경찰측 정부 추산이 시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적게 잡히고 있었던 것과, 232만명은 전국적인 참가 인원이라는 것을 감안하여야 한다. 당시 시민과 학생들은 이한열의 영정과 대형 태극기, '한열이는 부활한다' 등의 만장 300여개 등을 앞세운 운구 행렬을 따랐고, 이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모여 올림픽기와 태극기를 가리켜 "조기",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하자 김병식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올라가 조기를 게양했다. 뒤이어 근처 서울프라자호텔, 조선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등도 조기를 달았다.[* 원 출처: <스포츠와 정치> - 고광헌 저. 푸른나무. 1988. p75.]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의 군중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의 완전 퇴진을 위해 전민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대협도 백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군중들이 흩어져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 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저녁 9시까지도 햇빛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서울/강남|강남]]의 [[아파트]]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은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맨 위의 동영상 10분 20초 부근에서 한 중년 남성이 장미꽃을 거부하는 경찰에게 장미꽃을 억지로 꽂아주며 '''"경찰관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그 직후 경찰이 남성에게 "경찰관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라고 묻고 남성은 다시 그 경찰에게 "네!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장미|이거]] 달아야 합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4.19 혁명 당시 시위대 진압을 위해 온 군인들의 탱크 위로 한 어린아이가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를 외친 것과 비슷한 대목. 실제로 민주화를 논할 때 시위를 진압하는 입장이던(징병제로 군대나 전경으로 군대간 사람들)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고 있었다. || [[파일:external/archives.kdemo.or.kr/00735065_0001.jpg|width=100%]] || || '''오늘 기쁜날 [br] 차값은 무료입니다 [br]-가화다방 주인 백 -''' [br][br]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담화가 발표된 직후 소공동 가화다방[* 1992년 폐업. 저 사진이 화제가 된 후 매년 6월마다 인터뷰를 하는 등 유명해졌으나 지나친 정치적 관심이 부담스러워 가게를 닫았고 현재는 건물도 사라졌다.]에서 주인 전씨가 직접 내걸었던 무료영업 메시지. [br]당시 국민들이 가졌던 환희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2015년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는 동시에 전두환이 쫓겨나듯이 퇴임하고 그 후에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대한민국 헌법|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1987년 국민투표|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으로 개헌된다. 6월 항쟁은 사실상 15년 7개월 동안 걸친 [[권위주의]][* 제1공화국 시기 중 1958~1960년 [[4.19 혁명]] 시기, 1972~1979년 제4공화국 시기, 1980년 9월~1987년 6월 제5공화국 시기가 해당한다]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세계 시민 항쟁을 논할 때도 자주 나온다. 제1민주화 물결이 유럽과 미국의 보편선거권 운동이고 제2민주화물결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독립이라면 제3민주화 물결은 1980년대 한국의 6월 항쟁을 포함한 많은 피플 파워 혁명이고 제4의 민주화 물결은 [[아랍의 봄]]이라는 것.] 국민의 직선제 개헌안 목소리를 무시하고 간선제 유지로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부를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에 의해 굴러가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헌정사상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래 가장 길게 장수하고 있는 헌법 체제이다. 뿐만 아니라 1987년의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과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국민 스스로 독재정권의 치하를 끝내고 개헌을 이끌어낸 이 사건은 지금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1987년의 대한국민에게 자유라는 빚을 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